88 minutes - 정의와 진실 사이
                  그림 5.1 어디서 본 듯하지만, 딱히 어떤 연쇄살인마의 작품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 기괴한 시체처리(?)

    (필자는 이런 관점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순수한 관객입장에서 본 '88분'이라는 영화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작품 중에 하나다. 물론 알 파치노를 비롯해서 닐 맥도노프, 알리시아 위트, 릴리 소비에스키, 에이미 브랜만 같은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얼굴들'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시놉시스조차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인데다가, 살인마의 범행수법이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주고, 영화를 보다보면 '아, 저 X이 범인이겠네'라는 예감을 '아주 강하게' 하게 되고 그런 근거 없는 예상이 전혀 틀리지 않는 그런 종류의 영화다.  해외에서의 관객평은 아주 냉혹한 쪽이었다. 그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한 줄로 줄이자면 영화관에서 보기엔 돈이 아까운 영화 라고나 할까. 물론 알 파치노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면 모를까 필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어쨌든 이미 어느 정도 스포일러가 된 상태이지만, 앞으로는 거의 영화의 내용을 다 얘기할 듯 싶으니,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읽던가, 아니면 이런 영화 보느라고 시간을 쓰지 말던가....... 뭐 알아서 하도록 하고,

    [굳이 이 친숙한 얼굴들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자면, 알리시아 위트는 앨리맥빌에서 그랙의 애인이던 호프로 나왔으며,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크림힐드 역할로 나왔던 여자다. 두 작품에서는 그렇게 망가지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뭐...... 릴리 소비에스키는 딥 임팩트에서 엘리야 우드(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의 여자친구 역할, 잔다르크에서 타이틀 롤, 글래스하우스에서 누나 역할을 했다.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영 그래서인지 몰라도 인상이 좀 험해진 거 같은 느낌이다. 에이미 브랜만은 드라마 "Judging Amy"의 히로인으로 최근엔 그레이아나토미의 스핀오프인 프라이빗프랙티스에서 닥터 바이올렛 터너역할로 등장했고(그레이아나토미에서도 잠시 얼굴을 비춘 바 있다), 최근에는 제인오스틴북클럽에서 남편에게 채인 중년주부(!!!)로 나왔던 바 있다.]

                  그림 5.2 과연 실제로 이런 생중계를 하긴 할까? 

    어쨌거나, 여기서 알 파치노는 법정신의학자(Forensic Psychiatrist)인 잭 그램 박사 역을 맡고 있다. 일부 국내 영화사이트에서는 이 자의 직업을 범죄심리학자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 법정신의학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오역같긴 하다. 미국에서 법정신의학은 정신과 전문의 수료후 1년 이상의 펠로우쉽을 거쳐야 일을 할 수 있는 정신과 세부전공의 하나이다. 물론, 법(forensic)이라는 단어 때문에 법의학과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이쪽과도 큰 관계가 없는 분야이긴 하다. 이들 중에 실제인물은 아니긴 하지만, 의사로서는 가장 유명해진 '한니발 렉터'가 있는데....... 뭐 이 얘기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법정에서 법정신의학자의 주요 업무로는  피고의 정신상태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것(CST라고 한다)과 정신과적인 자문, 그리고 범죄를 저지를 당시의 피고의 정신상태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가를 판단하는 일(유명한 맥노튼 예를 참고하길 바란다)등이 있다. 어쨌거나 잭 그램 박사는 이런 일이 아닌 FBI요원이나 과학수사계 형사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FBI 자문 법정신의학자가 자기의 본래 업무 외에 뭘하고 있는지는 모르니, 뭐 그 정도는 애교로 봐주기로 하고......
  
    여기에 흔히 들어가는 편견 하나는,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계열의 범죄에서 생존한 사람이거나 희생자의 유가족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거의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확률적으로도 이런 범죄에 노출되기 힘들 뿐더러(실제 이런 사건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보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더 높다),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심한 트라우마를 받은 사람이 그와 관련된 업무를 남들보다 뛰어나게 할 가능성은 더욱 적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거의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게다가 미국이던 우리나라던, 의사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고, 심리적인 문제를 안은 채 정신과 의사가 되기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필자도 때때로 그런 황당한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거죠? 가 요즘 자주 하는 답이다) 성폭력이나 소아학대 등을 다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따라 다니는 소문들도 거의 비슷하다. 학교 다닐때 성폭력 희생자였거나 혹은 소아학대의 경험이 있어서 그 길에 들어섰다는 얘기는 솔직히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일텐데도 불구하고, 기자들이나 주변사람들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추측을 하곤 하는데...... 대개 이런 황당한 오해는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편견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 이 영화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잭 그램 박사의 동생은 이런 연쇄살인마의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참 구태의연하긴 하지만 이건 뭐 그렇다고 치자.

                  그림 5.3 세 여자의 배치가 팝아트를 연상케 한다.

    이 영화에서는 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물론 요즘 의료계나 법조계에 많은 여자들이 진출해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잭 그램 박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출연진이 여성 일색인 것은 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실제로 여자 연쇄살인마가 드물고, 대개 이런 형태의 연쇄살인범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부 남자인 것을 감안하면 더 그렇긴 하지만, 뭐 그 자체를 뭐라고 하긴 그렇고...... (사실 이런 구도는 필자가 좋아하는 타입이긴 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여자 주인공이 없다고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영화관을 가진 덕에 그다지 거슬릴 것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이런 장르영화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런 영화의 주된 키워드는 연쇄살인, MO(modus operandi), 모방범(copycat)으로, 비슷한 영화로 필자가 본 것만 수십편에 이르는 그다지 신선하지 못한 분야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카테고리(Cine Forensis)에서 다루고 있냐고? '난 절대 리바이벌은 안해'라고 늘 얘기하면서도 말이다. 

    
                  그림 5.4 하지만, 과학이 진실을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이 포스트에서 얘기할 부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잭 그램 박사는 연쇄살인범 존 포스터의 사형선고를 위해 증거조작을 했음을 시인한다. '생각해봐...... 정의, 진실. 어디에서 이들이 교차할까? (Think about...... Justice and Truth, Where's they intersect?)' 사실 이런 의문은 단순히 법정증인으로서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많은 전문가들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제나 모범해답은 명백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진실만을 얘기하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전문가'라는 말의 가치가 요즘처럼 헐값이 된 시대가 옛날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개나 소나 전문가라고 하는 시대를 지나서 근래에 와서는 전문가라는 말이 마치 '사기꾼' 혹은 '정치인' 수준의 얘기가 되어버렸다. 물론 사기꾼도 사기 전문가일테니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는 전문가는 정치적 혹은 상업적으로 경도된 이상한 사람이거나 혹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 확실치 않은 사람들이 주로 등장한다. 특히 의료 분야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전문가입네 하는 분야인지라, 신문, 방송에 누가 나오던 독자 혹은 시청자들은 그냥 전문가려니 하는 경향도 있어서, 정말 엉뚱한 사람이 전문가로 소개되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의사들끼리는 '왜 쥐뿔도 모르는 간호사가 저기 나와서 의사욕을 하고 있는거지?'라던가 '의사면허따고 나서 학술활동 한번도 안하고 동네의원에서 감기환자만 보던 일반의가 어떤 근거로 거의 대다수의 의사들이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는 의학의 최신지론이 거짓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지'라는 식의 얘기를 자주 한다. 물론 그들도 '일반인'이 아닌 '전문가'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식의 전문가라면 시장에서 물건파는 아줌마도 판매전문가이니까 토론프로에서 경제학 전문가로 나와서 서울 유수 대학의 경제학과 대학교수들과 토론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인지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일반인들이 안믿기 시작한게 요즘이다. 

    물론 이런 것은 신문과 방송에서 저질 전문가들이 판치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전문가들이 정말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아무리 '극초특급 캡 저질 전문가'라고 해도, 일반인 수준정도에서 조차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자체를 모르지 않을텐데도 태연자약하게 개소리를 해대는 전문가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바로 그 '진실'이 아닌 것들에 더한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몇몇 전문가들은 지속적으로 연구비를 받기 위해, 혹은 자신의 매명을 위해서 연구결과 자체 혹은 그 해석을 왜곡하고 있고, 흔히 폴리페서로 불리는 학계의 정계진출 후보자들은 자신의 의견이 특정 정당 혹은 국가기관의 정책방향에 가깝도록 쓰레기 같은 논문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학술논문에 싣고 있고, 그 학술논문의 편집자들(많은 폴리페서로 구성되었을지도 모르는)도 별다른 비판없이 글을 실어주고 있다. 동료들이나 후학들의 진실을 담고 있는 연구결과를 단지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입지를 위해 별다른 반론의 이유 없이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때로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로도 거짓말을 해댄다. 조금 깊게 들어가면 이건 실제로 그들의 존재이유가 도대체 뭔가 궁금해지는 전문가가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이런 부분은 복잡한 철학에 대한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인 철학에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전문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일반인들이 '저 새끼는 한나라당쪽이야? 아니면 통합민주당 쪽이야?'라던가, '도대체 뭘 쳐먹였는데 저런 개소리를 짖어대는거지?'라는 평가를 하게 된다면, 이미 전문가의 생명은 그게 끝인 거다. 불행히도 이쯤 되면 진실을 말하는 전문가조차 저런 쓰레기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리고 더 개판이 되다보면, 그 자체가 왜곡되어 사람들의 정치적인 입맛에 맞는 거짓 의견을 내놓는 자가 진정한 전문가로 추앙을 받는다. '저 자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믿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아주 달콤한 유혹에 빠지면, 곧이어 'OO당이 정권을 잡아야 우리나라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믿지?' 혹은 '이 연구가 학계인정을 받아서 수많은 연구비가 여기 투자되어야 이 치료법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라는 식의 남들을 쉽게 설득하기 어려운 유혹에도 쉽게 빠지게 할 수 있다. 거짓말은 한번이 어렵지 횟수를 거듭하다보면 그 거짓말 자체에 자신이 쉽게 속는 일이 벌어진다. (사이비 의료인들 중에 그 시술을 자신의 몸과 자기 자식들의 몸에도 했던 자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아무도 죽지는 않았으나, 어쨌거나 '남들을 완전히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속여야 한다'는 역설을 증명하는 에피소드중에 하나다.)

    최근에 인간광우병에 관련하여 신문, 방송 및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의외로 '인정받을 만한' 전문가의 의견은 별로 실리지 않는다. 단지 그냥 학술논문 몇 개 뒤져본 뜨내기 의사들의 '믿거나 말거나'식의 익명성 글들이 올라온다. 솔직히 그들이 의사인지도 잘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전문가들이 '별 얘기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다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실존하지 않는 (혹은 존재하나 잘 엄폐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질환에 대한 전문가도 극소수(이 숫자가 정확히 몇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숫자를 좀, 예컨데 수십명 이상으로 늘리려고 한다면 필자같은 무지랭이도 포함될지도 모를 지경으로 이 곳은 무주공산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물론 신문방송에 나가서 개소리할 전문가를 전문가라고 한다면 수만명도 될 수 있을 거다)이고, 나름 질환자체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질환은 어떤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분야이기 때문에 당연히 제대로 된 답이 나올리 만무하다. 그렇다보니, 뭔가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정치적이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이익단체에서 나온 얘기들은 당연히 경도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문가들의 입장은 입을 다물거나, 그보다 더 바람직하게는 '모른다'라고 얘기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뭔가 알고 있다면 아는 것만 얘기하면 된다. 사람들은 왜 전문가이면서 아무 얘기를 하지 않느냐고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비난에 전문가들은 초연해야 할 것이다. 전혀 모르는데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 자신의 얘기는 진실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과학자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가치던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만약 그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된다면, 일단 과학자로서의 삶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야구선수가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을 때 선수일 수 없듯, 진실을 외면하는 과학자는 더 이상 과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by 산채비 | 2008/05/22 00:40 | Cine Forensis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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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NSC at 2008/06/12 23:25
많이 바쁘신가봐요....;;

오랜만에 올라오네요;;;

88분 이번주 영화클럽 정모때 볼려고 했는데... 참고하고 봐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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